세리의 기도
세리의 기도
가브리엘
오, 하느님!
죄 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루가18:13)
바리사이파 사람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가 오늘 복음(루가18장)에서 비교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의 기도를 비교하기 이전에 바리사이파와 세리가 어떻게 달랐는지를 먼저 살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바리사이파는 '구별된 사람'이라는 뜻으로 율법을 철저히 지켜 죄에서 벗어났다고 자부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때문에 이들의 엄격한 율법주의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공격으로 이용되었으며 그럼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율법을 엄격히 지키는 자신들은 하나님 앞에 올바른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바리사이파의 생각은 오늘 언급되고 있는 기도를 보아도 저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11절)와 "세리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11절)라는 표현에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반면 세리는 외세의 지배에 해당되는 로마를 위해 세금 징수하는 일을 한다는 정치적 이유와 동시에 직업의 특성상 이방인들과도 접촉을 해야 한다는 종교적 이유, 그리고 정해진 세금액보다 많은 세금을 징수한다는 도덕적 이유 등으로 철저히 죄인으로 여겨졌으며 그 가족들까지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였고, 법정에서도 증언하지 못했던 사람들이었니다. 이러한 탓에 오늘 복음에 나오는 세리의 기도에는 자신의 삶에 대한 어떠한 자만심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하느님 앞에 설 자격이 없음을 알고 단지 "오, 하느님! 죄 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13절)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세리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하느님의 자비인 것입니다.
바리사이파와 세리의 기도는 자만심 또는 교만과 겸손함으로 비교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비교만으로도바리사이파와 세리의 기도에서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보다 더 들여다보면 도덕적 차원의 교만과 겸손을 넘어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에 대한 신앙적 성찰이 가능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자신의 삶을 지배하는 분으로 인정하지 못하고, 복음을 받아들이는데 주저하는 이유는 이러한 것들이 자기 스스로가 자기 삶의 주인이라는 인간적인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한다고 느끼는데 있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은총보다는 자기 최면에 걸려 사는 것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인간의 자기 과시가 삶의 추진력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자유로운 은사보다는 자신의 자랑할 만한 업적에 기대어 사는 것이 더 안전하고 마음이 놓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같은 그리스도인들도 자신이 정해놓은 기준에 못 미치는 사람들을 비난하면서 자신의 우월함을 느끼며 안심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면은 보수적인 신앙이던 진보적인 신앙이던 크게 다르지 않은 것같습니다. 다른 이들과는 다른 자신의 삶, 가치, 업적 등을 근거로 자신이 '참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며 스스로 위안하는 모습은 바리사이파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부끄럽지 않은 삶을 위해 각자가 헌신하며 투신하고 그렇게 살고자 힘껏 애쓰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로 인해서 내가 구별되고 내가 '참 그리스도인'으로서 인정받는 것이 아니고, 그러한 길을 걷고자 하는 나 혼자만의 능력으로는 온전하지 않으며 하느님의 자비를 겸손히 구하며 조심스레 한 걸음 한 걸음 기도하며 걷는 것이 나의 삶의 주인으로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신앙의 자세라는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여, 우리(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예수 기도'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근원에 대한 끊임없는 불안과 안전에 대한 요구로 자신에게 집착되어 있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 하느님과 만날 수 있는 통로가 바로 여기에 잇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눔, 그 아름다운 삶 / 가브리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