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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단군의 후손 구성(九性)의 내력

가랑비01 2006. 12. 5. 08:26
 

단군의 후손 구성(九性)의 내력


출처 겨래 밝히는 책들 4 맥이(貊耳)

지은이 농초 박문기



  지금 우리는 대개 단군의 피를 이어온 단일 민족임을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과연 어느 성씨가 진짜 단군의 피를 이었느냐’고 따져 물어 본다면 그 누구도 대답하기가 심히 곤란한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대개의 성씨가 그 뿌리를 중국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나라 사람들의 원시 조상이 거의 중국 사람이었고 그 몇 대 자손이 이 한반도에 오게 됨으로 인하여 한 성씨의 시조가 된 것처럼 알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게 각 성씨의 역대를 위로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이 땅에는 단군의 자손이 하나도 없고 거의가 중국에서 분파된 이들의 후예가 종족을 이루고 사는 나라가 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때문에 만일 중국인들이 이를 구실 삼아 원래는 자기네와 같은 민족임을 내세우게 된다면 지금의 우리로서는 대답하기가 실로 곤란한 실정이다.

  하여 필자는 殷(은), 林(임), 宋(송), 孔(공), 皇甫(황보), 韓(한), 奇(기), 鮮于(선우), 魚(어) 등 아홉 성씨의 내력을 들어 우선 이들이 다 단군의 후예임을 밝히고자 한다.


  대저 단군조선이 가장 강성했던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3800여 년 전 지금의 산동지방에서 일어난 상(商 ) 나라가 하왕실(夏王室)을 멸하고 중국민족을 멀리 서쪽으로 축출하면서부터 비롯되었다. 당시 상나라는 단군조선의 제후국에 불과했지만 능히 중국의 자주국가인 하나라를 멸하고 대륙을 차지했던 것이다. 이렇듯 중원의 영토를 확장한 상나라 군주가 바로 천을(天乙) 즉 탕임금이었다. 인하여 역사에서 성탕(成湯)이라 일컫고 지금까지 그 덕을 기리고 있다. 원래 상나라는 단군의 둘째아들 부우씨(夫虞氏)가 준후(俊候)의 자리에 있을때 그 손자 설(楔)이 중국을 문명시킨 공이 지대하다 하여 봉해 준 나라이다.


  그런데 후대에 이르러 국호를 은(殷)으로 고쳤기 때문에 지금까지 상나라가 은나라로 전해지고 있다. 준후란 100명의 제후를 거느리는 제후의 장을 일컬음이다. 때문에 부우씨를 산해경<山海經)에는 제준(帝俊)이라 기록하고 있고<단기고사(檀紀古史)>에는 동해왕(東海王)이라 기록되어 있다.


  은나라 선대왕들의 덕을 노래한 <<시전(詩傳)>> 상송(商頌)에 설의 업적을 일컬어 환발(桓發)이라 하였고 은나라 시대 갑골문(甲骨文)의 복사(卜辭)에는 제준 부우씨를 일컬어 고조(高祖)라 하였다. 이는 아마 시조 설이 환인(桓因), 환웅(桓雄), 환검(桓儉) 삼신의 법을 이었고 그 조부이신 제준 부우씨는 나라의 가장 높은 조상이라는 뜻일 것이다.


  제준 부우씨에 대한 내력이 산해경과 규원사화(揆園史話) 등에 대강 전해 오고 있는데 산해경에는 제준의 이름이 부우(夫虞)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고 천우(天虞)라 기록되어 있으며 규원사화에는 제준이라는 말이 없음이 자못 다르다. 그러나 산해경의 천우(天虞)라는 이름은 아마 夫자와 天자의 형태가 비슷함으로 인하여 잘못 전해진 글자일 것이다.


  제준이 동남 해외의 감수(甘水)의 사이에 있는 희화국(羲和國)의 여자를 취하여 열 명의 아들을 두었고, 그 아들들에게 각 하늘의 해를 상징하는 뜻으로서 한 자씩의 이름을 지어 주었다. 즉 첫째를 갑(甲), 둘째를 을(乙), 셋째를 병(丙) 넷째를 정(丁), 다섯째를 무(戊), 여섯째를 기(己), 일곱째를 경(庚), 여덟째를 신(辛), 아홉째를 임(壬), 열 번째를 계(癸)라 한 것이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이들을 십일(十日)이라 일컬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로 인하여 천간(天干) 즉 십간(十干)의 명칭이 비롯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제준 천, 부, 우 는 또 서쪽에서 상희(常羲)라는 여자를 취하여 열두 명의 딸을 두었는데 그 열두 명의 딸들은 각각 낳은 달이 달랐으므로 그 낳은 달을 이름삼아서 불렀다.

  예를 들면 동짓달, 섣달, 정월이, 이월이 등으로 부른 것이다.  때문에 이로 인하여 지지(地支) 즉 십이지(十二支)가 비롯되었고 여식을 딸<月>이라고 하는 말이 생기게 되었다고 한다.


  제준은 다른 여인들에게서도 여러 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리고 그 아들들에게는 다 봉지(封地)를 주었다. 그런데 희화녀에게서 낳은 십일(十日)에게는 하나도 봉지를 주지 않았다.


  그 십일 중의 하나가 유융씨(有娀氏)의 딸 간적(簡狄)과 혼인을 하게 되었는데 간적은 혼인을 하기 며칠 전에 냇가에서 세 여인과 함께 목욕을 하다가 현조(玄鳥:제비)의 알을 주워 먹고 기이한 느낌이 있었으며 열달 후에 설을 낳았다고 한다.

그래서 시전 상송에,


   하늘이 제비를 명하시어

   내려가 상나라의 조상을 낳게 하시다.  라고 하였다.


  이 설이 젊어서부터 순(舜)을 도와 순이 능히 중국의 임금이 되게 하였고 순임금은 설에게 사도(司徒) 벼슬을 시켜 중국의 백성들을 예의로써 가르치게 하였다. 순은 동이(東夷) 즉 조선의 미천한 사람으로서 중국에 들어가 중국 사람들이 가장 고통스러워했던 홍수(洪水)를 다스린 인물이다. 때문에 그는 요임금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올랐고 중국을 가히 문명국으로 발전시킬 수 있었다.


  순임금이 세상을 떠나자 설은 조선에 돌아오게 되었고 제준은 설에게 박 땅을 봉해 주었다. 박 땅은 지금의 산동성 하택현에 해당되는 지역으로서 당시 제준의 영지 내에 있었다.

설은 그 박 땅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상(商)이라 하였다.


  설의 아들 소명(昭明)은 활을 잘 쏘았고 손자 상토(相土)는 주거(舟車)라는 기이한 배를 만들어 멀리 해외의 동제(東鯷:지금의 대만)땅을 경략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시전 상송에,


‘상토의 빛나는 업적은 해외까지 가지런히 했도다.’ 라고 하였다.


  이 상토의 11대손이 바로 탕 임금이다. 그러니까 시조 환발씨, 즉 설에게는 13대손이 되는 셈이다.  탕 임금은 시조 설에 추존(追尊)하여 현왕(玄王)이라 일컬었는데 이는 시조가 제비의 알에서 태어났음을 세상에 밝힌 일이었다. 그는 또한 도읍을 오(隞) 땅으로 옮기고 그 도읍지 역시 박도(亳都)라 일컬었다. 때문에 사서에는 탕임금 이후 8대 중정왕(仲丁王)에 이르기까지 상나라 임금들을 박왕(亳王)이라 기록해 놓고 있다.

탕임금은 백성들의 복색을 바꾸게 하여 천하가 흰색을 숭상토록 하였다.


  탕임금의 16대손 반경왕(盤庚王)이 홍수의 근심을 피해 도읍을 다시 옛 박 땅으로 옮기고 국호를 은(殷)이라 고쳤는데 이때부터 상나라가 은나라로 일컬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반경왕의 아들 소신왕(小辛王)의 자손에서부터는 나라로써 성씨를 삼게 되었던 것이다.

은씨(殷氏)는 이렇게 아홉 성씨 중에서 가장 먼저 성씨를 갖게 되었다.


  소신왕의 손자 무정왕(武丁王)은 꿈에 본 부열(傅說)이라는 현자(賢者)를 등용하여 50년 동안 왕도정치의 극치를 이루었다. 또한 그 치도가 60여 년 동안이나 이어져 은나라의 문화는 가히 찬연함을 자랑할 만하였다.  그런데 그 5대손 무을왕(武乙王)에 이르러서는 왕이 무도하여 그 치도가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더니 마침내는 왕이 사냥을 나갔다가 벼락에 맞아 죽는 변을 당하였다.


  무을왕의 손자 제을(帝乙)에 이르러서는 비로소 제호(帝號)를 쓰게 되었다. 그 제을이 아들 셋을 두었는데 그 첫째를 미자계(微子啓)라 하였고 둘째를 미자연(微子衍)이라 하였으며 셋째를 주신(紂辛)이라 하였다.  그런데 사서에는 미자계와 미자연은 주신의 서형(庶兄)이라 전해오고 있다.  이는 아마도 그 두 사람이 미천한 궁인의 몸에서 태어났고 주신은 정비(正妃)의 몸에서 태어났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주신은 위로 두 형이 있음에도 제을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는데 이가 바로 은나라의 마지막 임금 주왕(紂王)이다. 그는 즉위 초에 도읍을 안양(安陽)에 옮기고 도읍지를 조가(朝歌)라 이름 하였다.


  주왕은 그 증조 무을왕보다 더 무도하여 사치를 일삼았고 달기(妲己)라는 요녀를 총애하였다. 인하여 정비를 죽이고 차비(次妃)를 자진케 했으며 정비에게서 낳은 은교(殷郊), 은홍(殷洪) 두 왕자를 죽게 하였다.  이에 주왕의 숙부 비간(比干)이 주왕 앞에 나아가 삼일을 물러가지 않고 극간하다가 도리어 죽임을 당하였다.  원래 비간은 그 형인 제을에게 미자계를 태자로 세울것을 권했으나 제을은 듣지 않고 주신을 태자로 세웠었다.


  때문에 주왕은 숙부 비간을 심히 마땅치 않게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다가 그가 자신의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함부로 하며 삼 일 동안을 물러가지 않았으므로 주왕이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내 들으니 성인의 염통에는 일곱 구멍이 있다고 하더군,”  하고 그 심장을 꺼내어 쪼개 보았다고 한다.


  상황이 여기에 이르자 비간의 아들 견(堅)은 목숨을 도망하여 장림산(長林山)으로 달아났다. 때에 그를 따를는 무리가 있어 그곳에 나라를 세우고 나라이름을 임호(林胡)라고 하였다. 그리고 임씨(林氏)로써 성을 삼게 되었다.


  임씨는 이렇게 아홉 성씨 중에 두 번째로 성씨를 갖게 되었는데 그 옛 장림산은 바로 지금의 유원성(유遠省) 귀유(歸유), 무천(武川) 등의 지역이다. 또한 그곳이 바로 황하 서쪽의 상류에 해당하므로 서하(西河)라 일컬었던 지역이다.


  이보다 먼저 주왕의 서형들인 미자계와 미자연은 주왕의 처사를 심히 좋지 않게 여기고 여러 번을 주왕 앞에 나아가 간했으나 주왕이 듣지 않았으므로 다 멀리 달아나 몸을 숨겨 버렸다.  주왕의 친척인 기자(箕子)는 환란이 장차 자신에게도 미칠 것을 예상하고 거짓으로 미친 체 하며 머리를 깍아 종처럼 하고 다녔는데 주왕은 그를 감옥에 가두고 쉰밥과 썩은 고기를 주었다.  당시 주왕의 정사란 달기에 고임이 있어 그녀의 말을 다 들어주고 부세를 과중하게 거두어들여 녹대(鹿臺)라는 창에 재물을 채웠으며 거교(鉅橋)라는 곳간에 곡식을 쌓았고 사구(沙丘)와 원대(苑臺)라는 놀이터를 넓혀 술로써 호수를 만들었으며 고기를 매달아 수풀을 만들어 밤이 새도록 마셨다. 그리고 제후 중에 배반하는 자가 있으면 이에 형벌을 무겁게 한다 하여 구리쇠 기둥에 기름을 발라 숯 불 가운데 세우고 죄지은 자로 하여금 오르게 하여 손발이 미끄러져 숯불 가운데 떨어지면 달기와 더불어 그것을 보면서 즐거워했고 이름 하기를 포락(炮烙)의 형벌이라 하였다.

  지금도 곤궁한 사람이 도탄(塗炭)에 빠졌다고 이르는 말은 바로 이에서 기인된 말이다.


  이렇듯 주의 무도한 정사가 날로 심해지자 서쪽으로 밀려갔던 중화족들이 그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마침내 서쪽 주(周)나라 희발(姬發)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왔다.


  역사에서는 희발을 무왕(武王)이라 기록해 놓고 있다. 무왕은 전쟁에 앞서 무리에게 필승을 다짐하여 말하기를,

“수(受)에게 억조의 이인(夷人)이 있으나 마음이 떠났고 덕이 떠났다. 나에게 난을 다스릴 만한 열 명의 신하가 있어 마음을 같이 하고 덕을 같이 한다”고 하였다.


  대저 윗글에서 억조이인(億兆夷人)이란 아마도 당시 은의 종주국인 조선을 포함한 동방의 대중을 말함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부터 단군이 동방 구이(九夷)의 장이 되었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주나라 무왕이 목야(牧野:지금의 하남성 기현)에서 은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도성을 공략하자 주는 보물을 쌓아 둔 녹대에 불을 지르고 자신도 그 불 속에 뛰어들어 타 죽었다.


  은나라를 멸한 무왕은 주의 아들 무경(武庚)을 옛 박도(亳都)와 가까운 패(邶:지금의 하남성 위휘부)땅에 봉하여 은나라 선대왕들의 제사를 잇게 하고 회(淮), 대(岱) 지역의 민심을 수습하게 하였다. 그리고 비간의 무덤을 만들어 주고 기자를 석방시켰다.


  기자는 은의 삼현 중의 한 사람이며 왕도에 대해 연구가 깊은 대철인 이었다. 하지만 은의 주는 무도한 임금이었기 때문에 기자의 뜻은 전혀 실행되지가 않았었다.

그러나 무왕은 이를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기자의 가르침을 받으려고 만승(萬乘)의 귀한 몸을 낮추어 친히 찾아갔다.  이에 기자는 그가 비록 조국을 멸망시킨 원수이지만 자신이 인간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오랫동안 연구했던 바를 그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것이 바로 지금까지 <<서전(書傳)>>에 전하고 있는 홍범(洪範)이다.


  무경은 조국을 멸한 주나라 무왕이 2년 만에 죽고 무왕의 어린 아들 성왕(成王)이 난국의 보위에 오르자 그 기회를 놓칠세라 즉시 광복군을 일으켰다.  그러나 무왕의 동생 주공(周公)이 이끈 군대에 패하여 죽임을 당했다. 주공은 은의 후예들이 살 수 있는 봉지를 빼앗아 은의 제사를 끊어 버리고자 하였다.  그런데 몸을 숨겼던 미자계가 제기(祭器)를 가슴에 안고서 주공을 찾아왔다. 이에 주공은 황망히 예를 갖추어 미자를 대하고 미자에게 봉지를 되돌려주었다. 즉 미자로 하여금 은나라 선대왕들의 제사를 받들게 한 것이다.


  원래 미자는 성품이 어질고 생각이 명철하여 은나라 사람들의 신망이 두터웠다. 때문에 주공이 그로 하여금 은의 유민을 다스리게 한 것이다. 미자는 국호를 송(宋)이라 정하고 민심을 안정시켜 주나라 군대를 물러가게 하였다. 인하여 주나라에서는 송나라를 제후국으로 대하지 않았고 빈국(貧國)으로 예우하였다고 한다.  뒷날 미자는 아우 미자연에게 보위를 전하고 세상을 떠났는데 역사에서는 미자연을 미중(微中)이라 일컫기도 한다.

  미중의 아들 계(稽)의 대에 이르러 나라이름으로써 성씨를 삼으니 역사에서 계를 송공(宋公)이라 기록해 놓고 있다. 송씨(宋氏)는 이렇게 아홉 성‘씨 중에 세 번째로 성씨를 잦게 되었다.


  송공이 정공(丁公) 신(申)을 낳고 신이 민공(緡公) 공(共)과 양공(煬公) 희(熙)를 낳고 희가 불부하(弗父何)와 여공(厲公) 방사(方祀)를 낳았다

  불부하의 자손들은 공족이라 하여 대대로 송나라에서 벼슬을 하였다. 불부하가 송부주(宋父周)를 낳고 송부주가 승(勝)을 낳고 승이 정고보(正考甫)를 낳고 정고보가 공부가(孔父嘉)를 낳았다. 이 공부가때 부터는 공실과 대가 멀어져 공씨로 행세하게 되었다


  공부가가 뒷날 화독(華督)이라는 흉적에게 죽임을 당하자 그 증손 방숙(防叔)이 화씨의 화를 피하여 노(魯)나라로 달아났다. 인하여 공씨는 노나라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고 아홉성씨 중에 네번째로 성씨를 갖게 되었다.  만고에 법을 드리운 대성인 공자(孔子)가 바로 공부가의 6세손이다.


  송나라는 여공(癘公)의 뒤를 이공이 잇고 이공에서 혜공(惠公)으로 혜공에서 애공(哀公)으로 애공에서 대공(戴公)으로 전해졌다. 대공이 공자(公子) 충석(充石)을 낳았는데 자(字)를 황부라 하였다. 황부가 계자래(季子來)를낳고 계자래가 남옹결(南擁결)을 낳았는데 조부의 자(字)로써 성씨를 삼았다.


  뒷날 남옹결의 후예 또한 송나라의 난을 피하여 노나라에 살게 되었고 노나라에서 다시 무릉(茂陵:지금의 섬서성 홍평현)에까지 옮겨 살게 되었다. 그때부터 이들은 부(父)자를 보(甫)자로 고쳐 황보씨(皇甫氏)로 행세하게 되었고 아홉성씨 중에 다섯 번째로 성씨를 갖게 되었다.


  이보다 먼저 기자는 자신을 따르는 은의 유중을 거느리고 조선에 돌아왔다.

인하여 조선에서는 고토에 돌아온 그에게 요서(遼西) 땅을 봉해 주고 조선의 번병(蕃屛)을 삼았다는 사실도 전해 오고 있다. 즉 조선에서는 그로 하여금 국경을 지키게 하여 주나라의 세력을 막은 것이다. 이를 근래 중국의 대학자 부사년(傅斯年)선생은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다.

“주(紂)가 죽은 후 은나라 사람들은 망국의 여중(餘衆)으로서 기자에게 의지하여 조선을 보호하였다. 조선이 일찍이 그 통치 내에 있지는 않았으나 심히 어려운 때 망국의 여중과 더불어 멀리 발해에 나라를 세운 것이다. 그러한즉 기자가 동쪽으로 간 것은 바로 요수(遼水) 밖으로 물러나 선왕(先王)들의 고토에 돌아갔을 따름이다.  이는 금(金)나라가 망한 후에 혼동강(混同江)가에 여진족이 보존된 일과 원(元)나라가 망한 후에 사막의 남북에 몽고족이 보존된 일과 같은 것이다“고 하였다.  이 기자를 요서에 봉해 준 조선의 임금은 바로 환솔귀(桓率歸) 임검(壬儉)이었는데 <<단기고사(檀奇古史)>>에는 그때의 일을 아래와 같이 기록해 놓고 있다.


“은나라 주(紂)의 친척인 기자 서여(胥餘)가 강달(姜達), 궁흠(弓欽)등 50인을 거느리고 와서 요수 서쪽 가에 머물자 제(帝)께서 가엽게 여기시어 그로 하여금 요서의 한 모퉁이에 살게 하였다. 인하여 기자를 우러러 흠모하는 은나라 백성들이 모여 살게 되었고 기자의 샘과 기자의 국경이 있게 되었다.


  기자의 뒤로 장혜(莊惠), 경로(敬老), 공정(恭貞), 문무(文武), 태원(太原), 경창(敬昌) 등의 왕으로 이어져 41대 애왕(哀王) 준(準)의 대에 이르러 1131년 만에 나라를 잃게 되었다.

  애왕이 망국의 유중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한안(韓雁)땅에 나라를 세우니 역사에서는 이를 마한(馬韓)이라 일컫고 있다. 그리고 이 마한왕의 자손에게 한씨(韓氏), 기씨(奇氏), 선우씨(鮮于氏)가 분파되었다는 사실이 행주기씨세보(幸州奇氏世譜)에 전하고 있다.


  그런데 애왕의 나라를 빼앗은 위씨(衛氏)의 시대에 이미 상신(相臣)한음(韓陰)이라는 이름이 전하는 것으로 미루어 세 성씨는 이보다 훨씬 오래전에 분파되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또한 이미 단군의 19대손 청아왕(菁莪王) 종선(從善)의 증손 환서여(桓西余)가 세 아들에게 한(韓), 선우(鮮于), 기씨(奇氏)의 성을 주었다는 <<단기고사>>의 기록도 전하고 있어 자못 의심스러운 바도 있다. 하지만 어느 한 기록이 사실과 다르다 하더라도 세 성씨는 다 단군의 피를 이어받은 후예들이다.


  환서여는 바로 단군의 장자 부루씨(夫婁氏)로부터 이어진 후손이다. 때문에 <<단기고사>>의 기록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세 성씨는 오히려 단군의 장자로 이어진 직계 혈손이 되는 것이다.

<<만성통보>>에 이르기를,

“선우씨(鮮于氏)의 세계(世系)는 중국 어양(魚陽)에서 나왔다는 <<씨족대전>>의 말을 인용하여 ‘기자가 소자(小子)를 우(于:어양)땅에 봉해 주었는데 그 후예가 선우씨가 되었다.‘ 그러한즉 선우씨는 바로 기자 소자의 후예이지 기준(箕準:애왕)의 후예가 아니다”하였다.

이는 아마 기자가 선왕의 땅을 보호하기 위해 자식들로 하여금 국경을 지키게 하여 연(燕), 제(齊) 등 주나라의 강한 제후국들의 침략에 대배한 것으로 짐작된다.  왜냐하면 어양은 당시 기자의 나라인 번조선(蕃朝鮮) 즉 요서(遼西)에서 서남으로 3백여 리 밖에 안 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양을 중국이라 했음은 책을 펴낸이가 그 땅이 원래 조선 땅 이었음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기에 다만 선우(鮮于)와 선우(嬋于)의 글자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몇 가지 구차한 사실을 들어 보기로 한다.


  원래 선우씨는 나라로써 성씨를 삼은 것이 아니라 성씨로서 임금의 호칭을 삼았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때문에 오환(烏丸), 선비(鮮卑)등의 동이가 다 그 임금의 호칭을 선우(嬋于)라 일컬었음이 전해오고 있다.  이로 인하여 왕실의 종친들이 아마도 임금의 호칭과 똑같은 글자를 피하기 위해 선우씨(鮮于氏)로 행세하게 되었고 그 성씨가 전해져 온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러나 감히 질정할 수가 없는 일이기 때문에 뒷날의 아는 사람을 기다릴 뿐이다.


  몽고에서 임금의 호칭에 성씨를 먼저 내세워 기악온(奇渥溫)이라 하였고 걸단 에서는 선우씨와는 정반대로 임금의 호칭을 한(汗) 또는 칸(可汗)이라 일컬어 그 성씨와 같은 글자를 피하였다.  그러나 뒷날에 이르러서는 몽고 역시 임금을 칸(可汗)이라 이컬었기 때문에 그 성씨를 온전히 지키지 못했고 걸단은 비록 설(揳)의 후예라 하여 국호를 거란(揳丹)이라 했지만 칸이라는 호칭을 쉽게 버렸기 때문에 역사가 장구하질 못했다.


  아무튼 아홉 성씨 중에서 여섯 번째, 일곱 번째, 여덟 번째로 성씨를 갖게 된 한씨, 기씨, 선우씨는 이 한반도에서 가장 왕성한 가지를 뻗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송나라는 대공(戴公)에서 무공(武公)으로 무공에서 선공(宣公)으로 이어졌다.

선공은 자신의 아들 태자 여이(與夷)를 제쳐두고 아우 목공(穆公)에게 나라를 전하였다.

목공은 선군(先君)이 자신에게 나라를 전해 주기 위해 자식을 저버린 의리를 잊지 못하여 역시 자신의 아들 풍(馮)을 제쳐 두고 선군의 아들 여이로 하여금 뒤를 잇게 했는데 그를 장공(   公)이라 한다.


  장공이 바로 공부가(孔父嘉)를 죽인 화독(華督)에게 죽임을 당했고 화독은 묵공의 아들 풍(馮)을 임금으로 세웠으니 이를 장공(莊公)이라 한다.  장공(莊公)의 뒤를 아들 민공(閔公)이 이었는데 남궁장만(南宮長萬) 이라는 흉적에게 죽임을 당했다. 화독도 그에게 죽임을 당했다.


  남궁 장만은 공자(公子) 유(游)를 새 임금으로 세우고 여러 공자들을 다 멀리 쫒아내 버렸다.  그런데 오래지않아 여러 공자들은 힘을 합쳐 새 임금을 죽이고 남궁장만을 잡아다가 젖(     )을 만들었다.  여러 공자들이 공자 어설(御說)을 임금으로 세우니 이가 곧 환공(桓公)이다. 환공이 차비에게서 공자 목이(目夷)을 낳고 정비에게서 공자 자부(玆父)를 낳았다.


  목이는 차비의 소생이지만 자부보다 나이가 위인데다 성품이 어질었다. 때문에 자부는 그 아비 환공이 병들어 죽음에 임했을 때까지 형인 목이의 어짐을 들어 형에게 전해 주어야 한다고 간청하였다.  그리하여 환공이 목이에게 임금의 자리를 전하고자 하였으나 목이는 굳게 사양하여 말하기를,

“능히 나라로써 사양하는데 어짐이 누가 더 크오리까. 신은 미치지 못하옵니다. 그리고 또 적자(嫡子)를 제쳐 두고 서자(庶子)로써 대통을 잇게 하는 것은 순리에도 맞지 않는 일이옵니다.”  하고 달아나듯이 물러나 버렸다. 하여 자부가 환공의 뒤를 이어 임금이 되었는데 이를 양공(襄公)이라한다.


  양공은 위인이 인후했으나 전혀 융통성이 없는데다 지나친 야망이 있었다. 그는 그 야망 때문에 초(楚) 나라의 포로가 되어 곤욕을 당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목이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대신 임금의 자리에 올라 초나라를 속이고 양공을 구해 냈다. 그리고 임금의 자리를 다시 양공에게 내어주고 신하의 자리로 되돌아갔다.

목이는 이처럼 어질고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때문에 그의 이름이 천고에 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 목이의 자(字)를 자어(子魚)라 하였고 그 후손들이 조상의 자로써 성씨를 삼게 되었다.


  어씨(魚氏)는 이렇게 아홉 성씨 중에 맨 나중에 성씨를 갖게 되었는데 지금의 함종어씨(咸從魚氏)가 바로 그 송공자 목이의 후예이다. 어씨는 또 서하(西河)에서 온 지씨(池氏)로부터 분파되기도 하였다. 고려 개국공신 지중익(池重翼)이 겨드랑이 아래 비늘이 세 개가 있었다. 이에 태조가 말하기를,


“너는 몸에 비늘이 있으니 바로 고기로구나.” 하고 어씨 성을 내렸다고 한다. 하여 지중익이 어중익이 되었는데 지금의 충주어씨(忠州魚氏)가 바로 그 어중익의 후예이다.

*여기서 잠시 독자제위께서는, 서하(西河)는 바로 비간의 아들 견이 세운 임호국이었음을 상기해 주시기 바람


  이상으로 대략 아홉 성씨가 단군의 후예임을 밝혔는데 그래도 혹 믿지 않을 이가 있을까 하여 몇 가지 사실을 더 들어 보고자 한다.


  규원사화(揆園史話)에 이르기를, 단군이란 박달임검(朴達壬儉)을 번역한 말이다. 대개 신시씨(神市氏)가 이미 박달나무의 아래에 내려왔었고 환검신인(桓儉神人)이 다시 박달나무 아래에서 천자의 자리에 나아갔다. 그러므로 인하여 단(檀)으로써 나라이름을 삼았으니 즉 단군이란 단국의 임금이라는 뜻이다 동방의 말에 단을 박달(朴達) 혹은 백달(白達)이라 하고 군장을 임검이라 하고 있다.


  지금까지 중국에 전하고 있는 <<만성통보(萬姓通譜)>>에도 상(商)나라 즉 은나라는 단백달의 후예라‘고 기록해 놓고 있다. 대개 단군의 후예에서 파생한 우리 동이민족의 시조 탄생설화는 난생설(卵生說)로 되어 있다. 즉 각 성씨의 시조 탄생설에 새와 알을 말하여 하늘의 명을 받고 ·태어났음을 밝힌 것이다.


  때문에 은의 시조가 알에서 나왔고 박씨(朴氏)의 시조와 동명성왕(東明聖王)이 알에서 나왔으며 육가야(六伽倻)의 시조들이 다 알에서 나왔다고 전하고 있다


  김씨(金氏) 석씨(昔氏)의 시조는 비록 궤(櫃)에서 나왔다고 하나 다 새와 관련이 있다. 왜냐하면 김씨의 시조가 세상에 나올 적엔 궤 곁의 나무에서 흰닭이 울었다 하여 그곳을 계림(鷄林)이라 하였고 석씨의 시조가 세상에 나올 적엔 궤 곁에 까치가 모여 있다가 날아갔다 하여 시조의 성을 까치 작(鵲)자에서 새조(鳥)자를 떼내서 석씨(昔氏)라 하였기 때문이다.

제주도의 고(高), 부(夫), 양(梁) 3성의 시조도 보록 땅에서 나왔다고 하나 시조들의 이름이 모두 을나(乙那)이다. 즉 이름에 다 새을(乙)자가 들어 있다. 또한 을(乙)자는 제비를 뜻하는 을(乙), 을(鳦) 등의 글자와 형태가 비슷하고 음이 똑같다ㅣ 때문에 새와 관련이 있음을 가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환발씨 후손인 탕임금의 이름을 천을(天乙)이라 했는데 새을(乙)자와 제비을(鳦)자는 바로 비슷한 형태로써 지금까지 전해오는 글자이다.

  탕임금은 그 용모가 심히 위대했으므로 후세에 걸출한 이물들을 흔히 그에 비기어 말하였다. 때문에 가야국(伽倻國)의 여섯 시조가 알에서 나왔을 때 다 그 신장(身長)이 9척이나 됨이 은의 천을(天乙)을 닮았다‘고 하였다.  천을(天乙)의 후예 중에 공씨의 공(孔)자도 바로 자(子)자와 을(乙)자가 합해져서 된 글자이다.


  대성인 공자(孔子)께서 세상을 떠나기 7일전에 제자인 자공(子貢)에게 자신이 은나라의 후예임을 밝힌 사실이 아래와 같이 <<가어(家語)>>에 전하고 있다.


“공자께서 아침 일찍 일어나시어 한 손으로 어깨를 주무르고 한 손으로 지팡이를 끌며 대문

앞을 거닐면서 노래하시기를,

‘태산이 무너지려나, 대들보가 부러지려나, 철인(哲人)이 시들려나.’ 하였다.

이미 노래를 마치시고 문 안으로 들어가시는데 자공이 듣고 말하기를, 태산이 무너지면 나는 장차 어디를 우러러보며, 대들보가 부러지면 나는 장차 어디에 의지하며, 철인이 시들면 나는 장차 어디에서 본받을까? 부자(夫子)께서 아마 병이 드실 모양이다‘ 하고 급히 따라 들어가 뵈오니, 부자께서 탄식하여 이르시기를,


“사(賜:자공의 이름)야 너의 옴이 어찌하야 더디나뇨? 내 어젯밤 꿈에 두 기둥 사이에 앉아 제사를 받았다. 하(夏)나라 시대엔 사람이 죽으면 동쪽 계단 위에 빈소(殯所)를 설치했으니 주인을 위함이요, 은나라 시대 사람들은 두 기둥 사이에 빈소를 차렸으니 곧 손님과 주인이 더불어 협시(挾侍)함이다. 주(周)나라 사람들은 서쪽 계단 위에 빈소를 설치하니 손님을 위함이다. 이 구(丘:공자의 이름)는 곧 은나라 사람이다. 대저 밝은 임금이 세상에 나오지 아니하면 누가 능히 나의 도를 높이리요. 내가 장차 죽으리로다.”  하시고 병석에 듣 7일 만에 세상을 떠나시니, 그때의 향년이 72세였다. 노성(魯城) 북쪽 사수(泗水) 위에 장사지내고 모든 제자들이 삼년상을 마쳤으나, 오직 자공은 부자의 묘 곁에 풀집을 짓고 육년 동안 떠나지 않았다.  이후부터 여러 제자와 노나라 사람이 묘 곁에 사는 자가 백여 호나 되니, 그곳을 공리(孔里)라 부르고 있다.


  공자는 평소에 자신의 도가 천하에 실행되지 못함을 한탄하시고 ‘구이(九夷)의 땅에 가서 살고 싶다’ 하였고 ‘뗏목이라도 타고 바다로 떠나고 싶다’고 하였다.  그러나 공자는 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공자께서 이르신 구이의 땅이란 바로 지금의 중국 동북지역과(당시는 고조선의 영토였음)한반도 전역을 말함이다. 그리고 당시 뗏목이라도 타고 가자고 했던 곳은 바로 지금의 한반도를 말함이었다.


  뒷날 공자의 53대손 연성공(衍聖公 완(浣)의 둘째아들 소(昭)가 원(元)나라 순제(順帝)때에 한림학사(翰林學士)로서 노위공(魯衛公)의 딸 대장공주(大長公主)를 모시고 고려 공민왕(恭愍王)에게 시집보내어 올 때 떠나면서 부자(孔子)께서 구이의 땅에 살고 싶어 했고 바다를 건너가고자 했던 뜻에 감동하여 말하기를, “동쪽 나라가 원래부터 의의 풍속이 있다고 일컬어져 왔음은 대개 단군, 기자와 같은 신성한 임금들의 교화가 전해졌기 때문이다. 내 장차 그곳에서 살리라.“ 하고 아내 황보씨(皇甫氏)를 데리고 왔다.


  지금 한반도에 분포되어 있는 창원 공씨(昌原孔氏)는 바로 이 공소(孔昭)의 후예라고 <<만성통보>>에 전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이 공 씨들은 대개 자신들이 대성인 공자의 후예이고 조상이 중국에서 건너온 줄로만 알고 있을 뿐이다. 조상이 원래 단군으로부터 이어져 왔음을 거의가 모르고 있다.


  그러나 사정은 공씨뿐만 아니라 여덟 성씨들도 마찬가지다. 이들 역시 원래 조상이 중국 사람이었고 중국에서 이 땅에 들어와 시조가 된 줄로만 알고 있을 뿐이다. 그 조상이 나라를 잃고 고토에 돌아왔다는 사실은 거의가 모르고 있다.


  대개 공자의 학문과 덕행과 예술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누구도 감히 어느 한 부분이나마 비기어 볼 수가 없었다고 전하고 있다. 때문에 인류가 생긴 이래로 공자와 같은 이가 없었다는 말이 전하고 있다.  그러한 공자가 바로 은의 후예였다. 때문에 은의 원시 조상의 땅에 가서 살기를 원하였다.  한림학사(翰林學士)란 임금을 측근에서 모시고 문서를 교열(校閱)하는 관직이다. 때문에 고금의 학문에 가장 능해야 하고 각 나라의 예법에 가장 밝아야 가히 발탁될 수 있는 벼슬이다.


  공소(孔昭)는 그러한 한림학사의 자리에 있으면서 국명으로 고려에 오게 되자 원시 조상의 땅에 오게 됨을 크게 감격하여 돌아가지 않을 결심을 하고 온 것이다.

그런데 지금 창원공씨 세보에 전하는 바로는 시조 설이 중국 성씨들의 조상인 황제(黃帝)의 후예로 되어 있다. 즉 황제의 증손인 제곡(帝嚳)의 아들로 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아마 창원 공 씨들이 처음 족보를 만들 때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를 근거로 했기 때문이다. 사기에는 설의 어머니 간적이 제곡의 차비로 되어 있다. 즉 우리 제비신화의 여인을 사마씨가 제비(帝妃)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따라서 설은 제곡의 아들이 될 수 밖에 없는 일이다. 그러나 당시의 연대를 살펴보면 대번에 그 왜곡됨을 알아낼 수가 있다. 이에 그 왜곡된 사실을 밝혀 보기로 한다.


  제곡은 70년 동안을 군위에 있었고 그 수가 99세로 전하고 있다. 그 뒤를 이어 아들 지(摯)가 9년 동안을 임금 노릇을 했는데 황음무도하여 제후들이 지를 폐위시키고 도당후(陶唐侯) 이기요(伊耆堯)를 임금으로 모시니 이가 바로 요임금이다.

  그러나 <<사기>>보다 4백여 년 전에 공자가 찬술한 <<서전(書傳)>>에도 요임금과 설이 제곡의 아들이라는 말이 없다.


  <<사기>>에는 또 요임금 70년에 순(舜)이 등용되었고 순이 요임금을 도와 정사를 한지 2년 만에 설을 발탁하여 백성들에게 오륜(五倫)을 일깨워 주는 사도(司徒)벼슬을 시켰다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제곡이 죽은 지 81년 만에 설이 비로소 직분을 얻은 것이 된다. 때문에 제곡이 99세 되던 해, 즉 세상을 떠나던 해에 설을 낳았다 해도 설은 그 당시 82세나 되는 노령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과연 설이 제곡의 아들이라면 요임금과는 한 핏줄을 나눈 형제간인데 어찌 구족(九族)을 친히 했다는 요임금이 기용하지 않았겠는가.


<<사기색은(史記索隱)>>에 말하기를,

<설은 요임금시대에 태어났고 순이 비로소 천거하였으니 반드시 제곡의 아들이 아니다. 그 아비가 미천했기 때문에 이름이 드러나지 않은 것이다. 그 어미 유융씨의 딸이 집안의 세 여인과 함께 냇가에서 목욕을 하였다 했으니 곧 제곡의 차비가 아님이 분명하다>고 하였다.

이로 미루어 공 씨들이 족보를 꾸밀 때 시조 설을 제곡의 아들로 만든 것은 크게 잘못된 일이었다.


  공 씨뿐만 아니라 여덟 성씨도 다 같이 그러한 누를 범 했다. 때문에 이미 거의가 단군의 후예임을 모르고 있다.


  부사년(傅斯年)은 본시 산동성 사람으로서 학문과 재주가 근세를 풍미했던 사람이다. 특히 그의 역사지식은 동서를 막론하고 가히 우이(嵎夷)를 차지할 만하였다.  그러한 대학자가 ‘기자가 동족으로 간 것은 바로 요수(遼水) 밖으로 물러나 선왕(先王)들의 고토에 돌아갔을 따름이다’고 하였다. 그리고 어느 민족이든지 망하게 되면 고토에 돌아간다는 예를 들어 금(金)나라와 원(元)나라의 일을 말했다.


  근세 중국에서 발굴된 은나라 시대의 청동기(靑銅器)는 이 한반도에서 출토된 청동기와 그 형태가 거의 똑같은 것이다. 특히 그 청동기 유물 중에는 우리 것과 똑같은 손잡이가 긴 수저가 있다. 그리고 ‘잔(盞)’이라고 새겨진 술잔도 있다.  대개 이 지구상에 지금까지 수저로써 밥을 먹어 왔던 민족은 그리 흔치가 않다. 그러기에 우리와 가장 가까운 중국이나 일본이 다 저(著)로써 밥을 먹고 있다. 중국인들에겐 다만 국물을 떠먹는 탕시(湯匙)라는 것이 전해져 왔을 뿐이다.  그것은 사기(沙器)로 짧게 만들어져 있어 수저에 비하여 조잡하기가 실로 이를 데 없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역대로 술 마시는 그릇을 배(盃)라 일컬어 왔다. 다만 하(夏)나라 시대 임금이 종묘에 제사지낼 때 썼다는 옥배(玉盃)를 ‘잔(盞)’이라 칭했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을 뿐이다. 때문에 중국인들은 지금까지도 ‘잔(盞)’이라는 말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자전>>같은 책에 ‘잔(盞)’자를 풀이하기를 <혹은 ‘배(盃)’라고도 한다.或曰盃也>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까지도 술 마시는 그릇을 ‘잔’이라 일컫고 있다.


  이는 필자가 9년 전에 대만 고궁박물원에 소장되어 있는 은나라 시대 청동기 유물을 직접 보고 크게 감격하여 대강 상고해 본 바의 일부만을 거론했을 뿐이다.

지금 우리는 흔히 백의민족임을 내세우고 있다. 그리고 지극히 순결한 민족임을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언제부터 흰옷을 입게 되었는지는 아마도 거의가 자세히 모르고 있을 것이다.


  옛날에 단군이 백성들에게 옷깃을 반드시 흰색으로 두르게 하고 그것을 동령<동정>이라 이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신단실기(神檀實記)>>에 이르기를, ‘흰색은 바로 백두산을 나타냄이요, 그것을 동령이라 하는 것은 동방사람의 옷깃으로 나타냄 이었다’고 하였다.


  이로 미루어 옛날에 탕 임금이 백성들에게 흰색을 숭상토록 한 정사는 실로 조상의 종법(宗法)을 천하에 잘 드러냈음이 아니겠는가.


  이상의 사실들을 대략 뭉뚱그려 보면 중국의 <<만성통보>>에 이미 은나라가 단군의 후예임이 밝혀져 있고, 우리에게만 전해져 오는 시조의 난생설이 있으며, 공자가 이 땅에서 살기를 원했고 스스로 은의 후예임을 밝혔으며, 공소가 단군 기자의 유풍을 말하고 이 땅에 돌아왔고, 부사년이 기자가 선왕의 고토에 돌아갔다고 밝혔으며, 은나라 시대의 청동기가 우리 것과 똑같고 은나라가 바로 흰색을 숭상한 백의민족이었다는 점 등이다.


  사실이 그러한데도 과연 예 은나라를 중국이라 일컬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다들 은나라를 중국이라 이르고 있다. 때문에 우리 조상이 만들어서 유구히 써온 문자까지도 한문(漢文)이라 하여 전폐시키려 한 적이 있었다.  무릇 한문이란 한(漢)나라 선비들이 지은 문장을 일컬음이지 결코 한나라 시대에 만들어진 글자라는 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한나라 이전에 육국(六國)을 통일한 진(秦)나라가 분서갱유(焚書坑儒)한 일이 있었고 그 진나라 이전 주(周)나라 때 공자가 시(詩), 서(書)를 정리하고 춘추(春秋)를 기술한 사실이 있었으며 그 주나라 이전 은나라 시대엔 갑골문(甲骨文)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갑골문이 바로 동양문자의 원조가 된다는 사실은 아마 웬만한 사람들은 거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들 그 은나라를 중국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문자가 중국의 문자가 되어 버린 것이다.


  어디 그 뿐인가, 수천 년 동안 기정사실로 배워 온 기자동래설을 일부 몰지각한 이들의 부인에 의하여 우리 역사교과서에서 완전히 빼내 버렸다. 물론 주(周)나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는 기자수봉설(箕子受封說)을 반대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무릇 기자수봉설은 동토(凍土)에 온지 천년이 지난 후에 한나라 선비들이 멋대로 꾸며낸 말이다.  때문에 일고의 가치도 없는 말이다. 혹 그러한 기록을 사실로 믿는 자가 있다면 이는 성인(기자)의 처사를 크게 욕되게 하는 일이다.


  지금에 이르러 민족사학자임을 자처하는 이들도 기자동래설을 적극 부인하고 있는 실정인데 이들 역시 은나라가 단군의 후예임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 중에는 아홉 성씨에 해당하는 이들도 상당히 있는 것으로 알려 지고 있다.  이제 만일 아홉 성씨들 중에 이 글을 읽고 혹 느끼는 이가 있어 무슨 동우회라도 만들어 우리 뿌리 찾기에 나서 준다면 그 얼마나 다행한 일이겠는가.


  필자가 이 글을 쓰게 된 연유는 오직 어느 군인장교의 돌연한 질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돌연한 질문이 바로 ‘지금 우리나라의 어느 성씨가 진짜 단군의 피를 이어왔느냐’는 물음이었다.  그때 필자는 선뜻 대답을 못하고 한참 동안 당황하다가 대략 너 댓 성씨의 내력을 들어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후일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썩 명료한 대답이 아니었다. 또한 이 문제를 밝히는 일이 우리의 사라진 혼을 되찾고자 애쓰는 이들에게 약간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황연히 깨닫게 되었다. 하여 고루함을 잊고 감히 여러 말을 상고하여 사이에 천박한 식견을 붙여 가면서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출처 : ■한반도의 비밀■
글쓴이 : ■한반도의비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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