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남은 존재 방식의 변화이다>
가브리엘
요한 복음 3장에 예수님과 유대 의회원인 바리새파 사람 니고데모와의 대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눈을 의식했는지, 아니면 예수님이 낮에 바쁘셔서 그랬는지, 아니면 조용한 시간에 진지하게 예수님과 대화를 하고 싶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니고데모는 밤에 조용히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니고데모가 먼저 예수님을 찾아와 예수님에게 '선생님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으로 안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하느님께서 예수님과 함께 계시고 있다는 고백을 합니다.
이러한 고백을 들으면 예수님은 대부분 '이스라엘에서 가장 복되도다'고 하시거나, '이미 낙원에 있다'거나 하는 등으로 그들을 칭찬해 주시거나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서에서 니고데모에게 예수님께서 던지신 말씀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누구든지 새로 나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과 함께 계시다는 사실과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보냈다고 고백한 것에는 개의치 않으시고 오히려 "정말 잘 들어 두어라"라고 하시며 "새로 태어나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입으로 또는 머리로의 고백'을 넘어 '새로이 태어나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거듭난다는 것, 새로 난다는 것' 즉 '태어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태어난다'는 것은 '아직 없던 무엇이 비로소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던 무엇이 다른 모습으로 변하여 다른 세상에 들어 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태어남에 대한 이해를 이현주 목사님은 아기가 태어나는 예로 설명합니다. 아기가 어머니의 탯집에 들어앉은 날을 아기가 태어난 날(生日)이라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생명은 그 전부터 이미 존재하였지만 그 생명이 약 10개월쯤 탯집에서 지내다가 좁고 위험한 산도를 거쳐 바같 세상으로 나올 때에서야 비로소 우리는 아기가 '태어난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즉 태어나는 것은 존재하는 '방법'과 몸 담아 사는 '세계'를 바꾸는 것을 이루는 말입니다. 지금까지 그를 살아 있게 한 생명줄(탯줄)을 끊고 새로운 줄에 목숨의 한 끝을 달아매는 것입니다.
니고데모의 신앙고백에도 불구하고,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새로 태어남'을 '어머니의 뱃속에서 다시 태어남'으로 이해하는 것을 보니, 니고데모는 철저히 인간을 육(肉)의 존재 즉 물질적인 존재로만 이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니고데모의 반응에 예수님은 또 한 번 "정말 잘 들어 두어라"고 강조하시면서 '물과 성령으로 새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육(肉)에서 나온 것은 육이며, 영(靈)에서 나온 것은 영이다'고 하십니다.
흙(물질)과 하느님의 숨(영)으로 인간이 창조되었듯이 '물(물질)과 성령(영)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은 물질적 존재임과 동시에 영적 존재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인간을 오로지 물(物)적 존재로만 이해한다면 인간에 대한 존엄과 가치는 사라지고 '대상화'될 수 있습니다. 희랍문화에서는 노동에 대한 이해, 특히 그 노동을 수행하는 노예에 대한 이해를 살펴보면 노예는 말할 줄 아는 기계로 정의되어 있습니다. 존엄과 가치, 정신과 영이 사라진 인간 이해는 대상화시킬 수 있으며 억압과 착취가 도덕적 문제를 수반하지 않습니다.
다시금 태어남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태어남'은 '존재하는 방법과 몸 담아 사는 세계를 바꾸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있게 한 생명줄(탯줄)을 끊고 새로운 줄에 목숨의 한 끝을 달아매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철저히 물질 중심의 인간 이해와 물질 중심의 세상 이해는 그 입에서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보내셨으며, 하느님께서 예수님과 함께 계신다'고 고백하여도 '새롭게 다시금 태어나야'만 합니다.
물질에 의존하는 존재 방법과 물질에 의존하여 몸 담아 사는 세계는 다시금 태어나야 합니다.
이 땅에 수 많은 교회가 '예수님에 대하여 고백'하고 있지만 나를 포함하여 하느님을 믿는 우리 모두가 물질 중심의, 자본 중심의 세계관에 의존하여 존재한다면, 또는 인간을 한없이 소외시키고 대상화시키며 착취하는 천박한 자본주의에 의존하여 존재한다면, 그리고 그 이념을 확대 재생산하는 일에 기여하고 있다면 그 교회를 비롯하여 우리 자신뿐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는 그 동안 자신을 지탱하여 주었던 생명줄 곧 물질 중심, 자본 중심의 사고를 끊고 인간의 존엄에 의존하여 존재하는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거듭 태어나야 할 것입니다.
나눔, 그 아름다운 삶 / 가브리엘
<그리스도, 영원한 벗>
김홍일
불행할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아
행복한 가난을 생각합니다.
다만 목마르고 굶주린다면
그것은
그리스도 때문이라는 고백도 생각합니다.
가난한 노래 / 김홍일
[그러면 "죽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떤 몸으로 살아나느냐?' 하고 묻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리석은 질문입니다. 심은 씨는 죽지 않고서는 살아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심는 것은 장차 이루어질 그 몸이 아니라 밀이든 다른 곡식이든 다만 그 씨앗을 심는 것 뿐입니다. 몸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뜻대로 지어 주시는 것으로 씨앗 하나 하나에 각각 알맞는 몸을 주십니다. 모든 육체가 다 같은 것은 아닙니다. 사람의 육체가 다르고 새의 육체가 다르고 물고기의 육체가 또 다릅니다.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고 별의 영광이 다르며 또 별과 별 사이에도 그 영광이 다릅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을 몸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몸으로 다시 살아 납니다. 약한 자로 묻히지만 강한 자로 다시 살아 납니다. 육체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육체적인 몸이 있으면 영적인 몸도 있습니다. 성서에 기록된 대로 첫 사람 아담은 생명있는 존재가 되었지만 나중 아담은 생명을 주는 영적인 존재가 되셨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것이 먼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육체적인 것이 먼저 있었고 그 다음에 영적인 것이 왔습니다. 첫째 인간은 흙으로 만들어진 땅의 존재이지만 둘째 인간은 하늘에서 왔습니다. 흙의 인간들은 흙으로 된 그 사람과 같고 하늘의 인간들은 하늘에 속한 그분과 같습니다. 우리가 흙으로 된 그 사람의 형상을 지녔듯이 하늘에 속한 그분의 형상을 또한 지니게 될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이 말을 잘 들어 두십시오. 살과 피는 하느님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썩어 없어질 것은 불멸의 것을 이어 받을 수 없습니다. 내가 심오한 진리 하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죽지 않고 모두 변화할 것입니다.](고린도 후15:35)
[바리새파 사람 중에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유대 의회원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밤에 예수께 와서 "랍비여, 우리는 당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신 줄 압니다. 하나님께서 같이 하시지 않으면 당신이 행하시는 그런 기적을 아무도 행할 수 없습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누구든지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다."
니고데모가 예수께 "사람이 늙은 뒤에 어떻게 다시 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날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하고 말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 내가 네게 다시 나야 한다고 한 말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불며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지는 모른다.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와 같다."
니고데모가 예수께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하고 물으니 예수께서 대답 하셨습니다: "네가 이스라엘의 선생이면서 이런 것을 알아듣지 못 하느냐?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는데 아직도 너희는 우리의 증거를 받아 들이지 않는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해도 너희가 믿지 않거늘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한다면 어떻게 믿겠느냐?"
"하늘에서 내려 온 인자밖에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마다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 한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하나님이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판을 받았다는 것은 빛이 세상에 들어왔건만 사람들은 자기들의 행실이 악하기 때문에 빛보다 어두움을 더 좋아했다는 것을 뜻한다. 악을 행하는 사람은 누구나 빛을 싫어하여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 행실이 드러날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리를 행하는 사람은 빛으로 나아간다. 그것은 자기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되어졌다는 것이 밝혀지도록 하려는 것이다."] (요한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