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잎 이야기

사라진 이웃

가랑비01 2005. 3. 23. 09:40

< 사라진 이웃>


대지가 꽁꽁 얼어붙은 어느 추운 겨울날이었다.

우연이라는 청년이 길을 걷고 있었다. 오후 이른 시간부터 주위는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우연이는 도서관에 갔다가 집을 향해 발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쌀쌀한 날씨에다가 갑자기 주위까지 어두컴컴해지면서 바람이 불고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지하철을 타려고 지하도를 한참 내려가고 있는 중에 어디선가 '형!'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주위를 둘러보니 덜덜 떨면서 바삐 움직이는 사람뿐이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다시 발길을 옮기는데 다시 '형!'하고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우연이는 내려가던 발길을 멈추고 뒤돌아 서서 자세히 보니, 어린 아이 하나가 계단에 웅크리며 엎드려 있었다. 조금 전 무심결에 지나쳤던 모습이었다.

그제야 우연이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지하도를 다시 올라가 아이에게 물었다. "네가 나를 불렀니?" 대답이 없다. "너가 나를 불렀니?" 아이는 아무 반응이 없이 엎드려 있을 뿐이다. 몇 번 물어도 반응이 없어서 우연이는 심상치 않은 생각이 들어 아이 몸에 손을 대 보았다.

아이의 몸은 그 자세 그대로 차갑게 굳어 있었다. 우연이는 위험하다고 생각이 드는 그 순간 아이를 굳어 있는 상태 그대로 조심스럽게 감싸안고 뛰기 시작했다. 우연이는 지금까지 병원에 가 본 적이 없었고 어떻게 입원을 시켜야 하는 줄도 몰랐다. 그냥 약2킬로쯤 되는 거리를 단숨에 달려 가까운 종합병원 응급실에 순식간에 도착했다.

응급실에 아이를 데리고 들어가 상황을 설명하니 간호사가 달려오고 의사선생님이 뛰어 오셔서 바로 수속을 밟을 사이도 없이 긴급히 치료에 들어갔다.

의사 선생님은 굳어있는 그 상태 그대로 데리고 빨리 온 것이 천만 다행이라고 하시면서 허기와 추위로 탈진하여 그리된 것이니 조금 기다리라고 하였다. 우연이는 병원비가 어떻게 될까 걱정도 되었지만 닥쳐서 생각할 일이고, 하느님께서 도와주시리라 믿으니 적이 안심되어 상황에 따라 대처하기로 했다.

주사를 꽂고 있던 아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볼이 불그레해지더니 몇 시간 후 일어났다. 아이에게 이름과 사는 곳을 묻고 원무과에 가서 계산이 어떻게 되냐고 했더니 아이와의 관계를 물어 보았다. 우연이는 있는 그대로 상황을 설명하였다.

병원에서는 정확한 연고가 없으면 비용은 자신들이 알아서 처리해 주겠으니 걱정 말라고 했다. 다만 밤이 깊어졌으니 데리고 온 보호자가 알아서 다시 데리고 가라고 하였다. 우연이는 응급환자를 돈이 없다고 병원에서 안 받는다는 뉴스를 많이 들어 왔는데 이렇게 처리해 주는 경우도 있구나 하며 무척 고마워했다.

밖으로 나와서 아이에게 신상에 대해서 다시 자세히 물으니 우연히 성이 같고 이름도 필연이라 거의 비슷하였다. 아이는 고아원에 있다가 며칠 전에 나왔다고 했다. 서울 무슨 동인데 전화번호는 모르겠고 그 동네 가보면 알 수 있다고 했다.

밤은 깊어지고 당장 차편도 적당하지 않아 우연이가 가끔 가던 북한산 계곡에 있는 기도원에서 하루 밤을 보내기로 했다.

그 시간 밖은 저녁에 내리기 시작하던 눈이 계속 내리고 있었다. 강한 바람이 불면서 앞이 안 보일 정도로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거리는 온통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기도원에 들어가서 따뜻한 라면을 먹고 따뜻한 물에 세수를 하고 따듯한 방을 무료로 제공받아 밤을 잘 지새우고 새벽에 일찍 기도원을 나섰다.

내려오는 계곡과 산길은 온통 밤새껏 하얗게 쏟아져 내린 눈꽃으로 뒤덮여 있어 절로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쌓여 있는 눈을 밟을 때마다 뽀도독 뽀도독 소리가 천지를 울렸다. 소복소복 쌓여서 발목까지 눈 속에 파묻히는 새벽 계곡과 산은 대낮처럼 밝았고 신비롭고 아름다워 이 곳이 눈꽃으로 이루어진 낙원이 아닌가 싶었다. 온산은 고요했다.

아이와 함께 버스를 여러 번 갈아타서 아이가 살았다는 동네를 찾아가 보고, 친척이 있다는 동네를 찾아가 수소문했으나 친척집과 고아원을 찾을 수 없었다. 할 수없이 우연이는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갔다.

우연이가 집에 돌아오니 집 식구들이 무척 걱정하다가 반가이 맞아 주었다. 우연이가 갑자기 소식이 없다가 돌아와서, 우연이 어머니는 반가우면서도 아이를 데리고 온 것에 대해서 걱정을 하셨다.

사실 우연이네는 대가족이 비좁은 지하 방에서 어렵게 살고 있었다. 우연이도 가정형편이 어려워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휴학과 복학을 연이어 반복하고 있었다. 이번 겨울은 매우 추워서 일자리가 마땅하지 않아 우연이는 쉬는 날이 많았는데, 집에 있기가 그래서 도시락을 싸가지고 시립도서관에 가곤 했다.

시립도서관 식당에서는 도시락만 가지고 가면 반찬이 불충분해도 오뎅 국물에 간단히 점심이 해결되었다. 집에 가만히 있는 건 보기 안 좋으니 놀더라도 도시락 들고 밖에 나가서 놀라고 우연이 어머니는 도시락을 싸주곤 하셨다.

우연이네 집에 와서 조용히 식사하고 아무 말이 없이 묻는 말에만 대답하고 조용하게 몇 시간을 있던 아이는 불편을 주기 싫었는지 말없이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장대비가 강한 바람과 함께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는 어느 가을날이었다.

우연이는 자기 본체을 위해 세찬 바람에 흩날리며 떨어져 내리는 나뭇잎을 바라보며 "한 장의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은 우주가 흔들리는 것 같다.나뭇잎은 뿌리를 의지하고, 뿌리는 나무를 의지하고, 뿌리는 대지를 의지한다. 뿌리는 하늘과 땅을 순환하여 땅속을 흐르는 물을 흡수한다"라는 어느 문인의 말을 가을비 우산 속에서 문득 생각하며 잰걸음으로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빗길을 걷고 있는 우연이는 어떤 장면을 보았다. 비가 쏟아지는 한적한 도로 한 가운데 어떤 남자가 웅크리고 앉아 있는 걸 우연히 보았다. 차들이 많이 다니지는 않지만 비가 오고 어두워서 매우 위험해 보였다.

드문드문 행인이 있었으나 무심코 보고는 달아나듯 그 자리를 피해갔다. 만약에 자동차 운전자가 미처 발견하지 못하기라도 하면 심각한 일이 벌어 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우연히 마주친 모습을 보게된 우연이는 다가가서 그 남자를 불렀다. 계속 부르니 남자가 눈을 뜨고 쳐다보는데 술 냄새가 확 풍긴다. 일어날 수 있느냐고 물으니 입을 열지 못한다. 말을 하려고 해도 입 밖으로 말이 나오지 앉고 입안에서 맴돈다. 전화번호를 물으니 안타까운 표정으로 우물우물한다. 그래서 숫자를 하나씩 부를테니 맞으면 눈을 깜박이든지 고개를 끄덕이라고 하니 알아듣고 눈을 깜박였다.

숫자를 하나하나 확인하여 집에 전화를 걸었다. 연령과 인상착의를 말하니 남편이라고 한다. 장소를 가르쳐 주니 바로 오겠다고 했다.

잠시 후에 멀리 아주머니와 여고생으로 보이는 학생이 달려왔다. "안녕하세요. 여깁니다"하고 우연이가 아는 체를 하였다. 그런데 아주머니는 우연이를 본 척도 안하고 무시하며,"이 인간이 또 지랄이야. 디질라면 곱게 디지지"하면서 남자를 무지하게 때리더니 딸과 남자를 질질 끌고는 저 멀리 빗속 어둠 속으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 밤이었다.

지루한 장마가 끝나고 맑고 화창한 날씨가 계속 이어지며 온 나라가 찜통더위로 인한 열대야 현상으로 밤을 설치는 한 여름밤이었다. 직장 동료들과 거나하게 한 잔 걸치고 기분좋게 콧노래를 부르며 발길을 재촉하고 있는 우연이에게 또 어떤 장면이 우연히 나타났다.

머리가 허연 노인이 길거리에서 신발을 한 쪽에 가지런히 벗어 놓고 지팡이를 옆에 세워놓고 잠을 자고 있었다. 우연이는 모른 척하고 지나가려고 하는데 발을 붙잡는 것이 있었다. 노인은 도로와 보도의 경계선인 경계석 위에서 길다랗게 자고 있었다. 가로등이 도로를 비추고 있지만 그 옆에는 없고 어두웠으며 유턴구역이었다.

그 곳은 평소 때에도 유턴 하던 차들이 속도를 조절하지 못해 커다란 가로수를 들이받아 차가 부서지고 가로수가 절반쯤 부서지는 위험한 장소였다. 경계석 아래로 몸이라도 기우뚱해져서 구르면 아찔한 상황이 생길지도 몰랐다. 우연이는 노인을 불렀다. 대답이 없다. 계속해서 더 큰 소리로 부르니 눈을 떴다.

"할아버지 여기는 위험하니 집에 가셔서 주무세요"
"나 집에 안가 더워서"
"집이 어디세요?"
"나 집이 어딘지 생각이 안 나니 한 숨 자고 야그 하자"
"집 전화가 몇 번이에요?"
"응 여기 있어"하면서 종이를 내민다.

우연이가 손전화로 집에 거니 할머니가 받는다.
"안녕하세요. 거시기 할아버지 댁이지요? 여기 집에 못 가시고 계시는데 모셔 가셔야죠"
"그 잉간 들어오던지 말던지 쓰잘데기없이 신갱 쓰지 말고 댁 여편내나 신경 써"
딸각하고 바로 할머니가 전화를 끊는다.


"어디다 전화한 건가?"
"예 할머니가 전화를 받으시더니 잘 들어 오시래요."
"그래 참 내 전화기 어디 있지?"
"못 봤는데요."
"금방 전화 썼쟎아."
"아니요, 제 손 전화로 걸었는데요."

"아까 전화기 달라 해서 전화기를 썼쟎아."
"아니에요. 할아버지 전화기는 못 봤어요."
"어라 이 사람 보게나 분명히 전화 달라고 해서 전화기 가져갔잖아."
"아니에요. 잘 찾아보세요"
할아버지는 한참을 뒤지면서 전화기를 찾는다. 그리고 뒷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낸다.

" 어! 내 지갑은 어디 갔지? 그러면 아까 내가 준 것이 지갑이었나 보군 . 내 지갑 빨리 주게"
"할아버지가 저에게 전화번호 적힌 종이를 주었잖아요"
호주머니를 뒤지니 종이가 나온다.
" 아무튼 지갑 주게"
"못 봤어요"
"이 사람 이러면 안되지"

할아버지는 즉시 112로 전화해서 지갑 가지고 가서 안 내놓는다고 경찰을 불렀다. 경찰이 왔다. 길거리에서 상황을 얘기하니 노인은 막무가내로 지갑을 우연이에게 주었다고 우기며 자신이 한때 어디에 근무했었는데 누구누구를 잘 안다고 모두 가만 두지 않겠단다.

"젊은 선생님 일단 112신고가 들어왔고 할아버지가 저렇게 주장하니 일단 경찰서로 갑시다. 가서 자세히 따져보고 아무래도 정확한 정황을 조사해서 보고서를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일단 두분 다 차에 타시죠"

이렇게 해서 우연이는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 경찰서에 가서 조사를 받고 진술을 있는 그대로 하게 되었다.
우연이가 "할아버지는 어디에서 술을 드시고 오셨어요"물어보니
"나 바로 그 앞 건물 지하술집에서 술을 먹고 바로 나왔지"
"아까 그 앞에는 술집이 아니라 지하는 공장이고 이층은 병원이고 일층은 옷가게랍니다. 그 시간에 전부 문을 닫았었지요. 그 근처에는 술집이 하나도 없어요, 경찰 아저씨들이 파출소에 연락해서 확인해 보세요"

경찰이 조사를 마칠 무렵 할아버지 식구들이 나타났다. 경찰서 문을 나오니, 자가용을 타고 할아버지는 식구들과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봄은 소리 없이 왔다.

꽃은 밤마다 이슬을 먹고 아침이 되면 활짝 피어나고 있었다. 우연이는 오늘 너무 기뻤다. 우연이의 나이 이제 중년으로 같은 동갑 친구가 "시장에서 길을 묻다"란 책을 출판했는데 며칠만에 역사상 최고의 판매 부수를 기록했다.

친구의 성공적인 출판을 기념하기 위해 오늘 몰려든 친구들만 만 여명이 넘었다. 참가 신청이 쇄도하자 밀려드는 독자들의 신청을 주체못한 주체 측에서는 급히 서울대운동장을 빌려서 출판 축하 모임을 갖게 되었다.

강원도 순박한 산골처녀가 경상도 아지메가 되어 구수한 갱상도 사투리로 평범한 서민들의 삶을 쉬운 글로 써서 평범한 서민들의 가슴을 뒤흔들었다.'시장에서 길을 묻다'는 시장통 언어로 엮어낸 달콤하고 샆스름한 유머로 전국민의 폭발적인 화제가 되었다. 소설보다 재미있고 감동적인 육담은 이 시대를 살며 사랑하는 현대인의 필독서가 순식간에 되었다.

축하 모임에 간 우연이는 밤이 깊도록 잔을 돌리며 갑장 친구들과 술을 먹고 신나게 놀고는 몸을 가누지 못하는 친구들을 끝까지 배웅했다. 우연이는 흥얼거리며 밤늦게 산동네 자신의 보금자리를 향해 골목길을 올랐다.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대는 골목길을 지나면서,우연이는 그 동안 자신이 보았던 사라져간 이웃들을 생각하며 깊은 상념에 빠져들었다.

우연히 만나서 사라져간 많은 이웃들을 생각하며 이제는 몸조심하여 시비에 휘말리는 일이 드물어졌다. 이제 우연이는 무슨 일이 벌어지면 황급히 몸을 피하는 경우가 많게 되었다.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은 아직도 뭔가가 항상 남아 있다.

우연한 인연들은 슬프고도 아름답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은 분명 적지 않은 인연 일진대 어디까지 외면하고 어디까지 인연을 만들어 나가야 할 지 알 수 없다. 그런 자신이 우스웠고 또다시 우연한 일에 휘말리면 잘 못 일이 이상하게 꼬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던 우연이는 골목길가에서 우두커니 멍하니 서 있다가 그 자세 그대로 앉았다.

밤새껏 마신 술 때문에 그리고 며칠째 계속되는 업무로 인한 피로가 겹쳐서 술기운과 잠이 오는 것을 어쩌지 못하고 순식간에 주저앉아 그대로 정신을 놓아버렸다.
....................................................................
한참 후 우연이는 일어났다.
일어나자마자 자신의 소지품을 확인하고 시계를 보니 딱 한시간을 길에서 잠을 잤다.

컴컴한 산동네에 불빛이 하나, 둘 깜박이며 저 멀리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는 우연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때 새벽 종소리가 울렸다.

 

ㅡ보리수ㅡ

'풀잎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만원짜리 매미  (0) 2005.03.27
그 때 그 사람들  (0) 2005.03.25
어찌 이런 일이?  (0) 2005.03.21
어린이나라  (0) 2005.03.20
정월 대보름날의 추억  (0) 2005.0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