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추운 겨울날이었습니다.
우연이는 도서관에 갔다가 일찌감치 집을 향해 발길을 재촉하고 있었습니다.
대지는 을씨년스럽게 꽁꽁 얼어붙었고 한낮인데도 시커먼 먹장구름이 하늘을 가리고 거리는 어두컴컴해졌습니다. 갑자기 세찬바람이 불면서 눈발이 시야를 분간할 수 없게 날렸습니다.
우연이가 지하철을 타려고 지하도를 한참 내려가고 있는 데 어디선가 '형!'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니 몸을 움츠리고 덜덜 떨면서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뿐이었습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우연이를 부를 만한 사람은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잘 못 들었다고 생각하면서 다시 발길을 재촉하였습니다.
그런데 다시 '형!'하고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분명히 들렸습니다. 우연이는 내려가던 발길을 멈추고 뒤돌아서서 자세히 보았습니다.
어린 아이 하나가 계단에 웅크리며 엎드려서 구걸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조금 전 무심결에 지나쳤던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우연이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지하도를 다시 올라가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네가 나를 불렀니?" 아이는 대답이 없었습니다.
"너가 나를 불렀니?" 아이는 아무 반응이 없이 엎드려 있을 뿐이었습니다.
몇 번 물어도 반응이 없어서 우연이는 심상치 않은 생각이 들어 아이 몸에 손을 대 보았습니다. 아이의 몸은 그 자세 그대로 차갑게 굳어 있었습니다.
우연이는 아이가 위험하다고 생각이 드는 순간 아이를 굳어 있는 상태 그대로 조심스럽게 감싸안고 뛰기 시작했습니다. 우연이는 수 킬로의 거리를 단숨에 달려 가까운 종합병원 응급실에 순식간에 도착했습니다.
우연이는 지금까지 병원에 가 본 적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입원을 시켜야 하는 줄도 몰랐습니다. 병원에 도착하였지만 난감하였습니다. 우연이 호주머니에는 달랑 교통비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생명이 경각에 달려있어서 일단 응급실로 달려갔습니다. 응급실에 들어가니 간호사가 달려오고 의사선생님이 뛰어 오셨습니다. 수속을 밟을 사이도 없이 긴급히 응급치료에 들어갔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굳어있는 그 상태 그대로 데리고 빨리 온 것이 천만 다행이라고 하시면서 허기와 추위로 탈진하여 그리된 것이니 조금 기다리라고 하였습니다. 우연이는 병원비가 어떻게 될까 걱정이 되었습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하느님께서 도와주시리라 믿으니 어느 정도 안심되었고 상황에 따라 대처하기로 했습니다.
주사를 꽂고 있던 아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볼이 불그레해지더니 몇 시간 후 일어났습니다. 아이에게 이름과 사는 곳을 묻고 원무과에 가서 계산이 어떻게 되느냐고 했더니 아이와의 관계를 물어 보았습니다. 우연이는 있는 그대로 상황을 설명하였습니다.
병원에서는 정확한 연고가 없으면 비용은 자신들이 알아서 처리해 주겠으니 걱정 말라고 했습니다. 다만 밤이 깊어졌으니 데리고 온 보호자가 알아서 다시 데리고 가라고 하였습니다. 우연이는 응급환자를 돈이 없다고 병원에서 안 받는다는 뉴스를 많이 들어 왔는데 이렇게 처리해 주는 경우도 있구나 하며 무척 고마워했습니다.
밖으로 나와서 아이에게 신상에 대해서 다시 자세히 물으니 우연이와 성이 같고 이름도 필연으로 거의 비슷하였습니다. 아이는 고아원에 있다가 며칠 전에 나왔다고 했습니다. 서울 무슨 동네인데 전화번호는 모르겠고 그 동네 가보면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밤은 깊어지고 당장 차편도 적당하지 않아 우연이는 가끔 가던 북한산 계곡에 있는 기도원에서 하루 밤을 보내기로 했습니다.
오후에 내리기 시작하던 눈이 계속 내리고 있었습니다. 강한 바람이 불면서 앞이 안 보일 정도로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거리는 온통 눈으로 뒤덮였습니다.
기도원에서는 따뜻한 방을 무료로 제공해 주고 밤을 지새워 기도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고 있었습니다. 따뜻한 라면을 먹고 따뜻한 물에 세수를 하고 밤을 잘 지새우고 새벽에 일찍 기도원을 나섰습니다.
내려오는 계곡과 산길은 온통 밤새껏 하얗게 쏟아져 내린 눈꽃으로 뒤덮여 있어 절로 탄성을 자아내게 했습니다. 쌓여 있는 눈을 밟을 때마다 뽀도독 뽀도독 소리가 천지를 울렸습니다. 소복소복 쌓여서 발목까지 눈 속에 파묻히는 새벽 계곡과 산은 대낮처럼 밝았고 신비롭고 아름다워 이곳이 눈꽃으로 이루어진 낙원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온산은 고요했습니다.
아이와 함께 버스를 여러 번 갈아타서 아이가 살았다는 동네를 찾아가 보고, 친척이 있다는 동네를 찾아가 수소문했으나 친척집과 고아원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우연이는 하는 수 없이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우연이가 집에 돌아오니 집 식구들이 무척 걱정하다가 반가이 맞아 주었습니다. 우연이가 갑자기 소식이 없다가 돌아와서, 우연이 어머니는 반가우면서도 아이를 데리고 온 것에 대해서 걱정을 하셨습니다.
사실 우연이네는 대가족이 비좁은 지하 방에서 어렵게 살고 있었습니다. 우연이도 가정형편이 어려워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휴학과 복학을 연이어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이번 겨울은 매우 추워서 일자리가 마땅하지 않아 우연이는 쉬는 날이 많았는데, 집에만 있기가 그래서 도시락을 싸가지고 시립도서관에 가곤 했습니다.
시립도서관 식당에서는 도시락만 가지고 가면 반찬이 불충분해도 오뎅 국물에 간단히 점심이 해결되었습니다. 집에 가만히 있는 것은 보기 안 좋으니 놀더라도 도시락 들고 밖에 나가서 놀라고 우연이 어머니는 도시락을 싸주곤 하셨습니다.
우연이네 집에 와서 조용히 식사하고 아무 말 없이 묻는 말에만 대답하고 조용하게 몇 시간을 있던 아이는 불편을 주기 싫었는지 홀연히 말없이 사라졌습니다......
지나고 나면
고마움입니다.
내가 만난 모든 것
나를 만난 모든 것
지나고 나면
모두 고마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