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과 나눔

자기 자신을 살리라

가랑비01 2007. 2. 27. 10:06

                          "어디 자기 자신도 살려보라지"

                                                            가브리엘

 

 

 그들이 해골이라는 곳에 이르러 예수를 십자가에 달고 함께 끌고간 죄수도 하나는 오른편에, 하나는 그의 왼편에 달았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그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들이 예수의 옷을 제비봅아 자기들끼리 나누었습니다.

 

 군중은 서서 쳐다보고 있었고 지도자들은 조롱하며 "이 사람이 남들을 구원했으니(살렸으니) 정말 하나님의 그리스도요 택함 받은 자라면 자기를 구원하게 하라"하고 말했습니다.(누가23:33)

 군인들도 또한 예수를 회롱하면서 가까이 가서 신 포도주를 드리고 "당신이 유대인의 왕이거든 자기자신을 구원하시오."하고 말했습니다.

 

 예수의 머리 위에는 "이 사람은 유대인의 왕이"라고 쓴 패가 있었습니다. 예수와 함께 달린 죄수 중의 하나는 "당신이 그리스도가 아니요? 당신 자신을 구원하고 또 우리를 구원하시오"하고 예수를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죄수는 날카롭게 반박했습니다: "너는 하나님이 두렵지 않으냐? 우리는 우리의 범죄로 그 보응을 받았지만 이분은 아무것도 잘못한 일이 없지 않으냐? 그리고나서 말했습니다: 예수님, 당신이 당신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에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게 될 것이다."

 

 현대 사회는 자유와 평등에 바탕을 민주 사회입니다. 도덕적 논리와 법률에 따라 무한경쟁을 하는 신용사회입니다. 현대 사회는 더불어 함께 사는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시대라고 사람들은 믿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현대사회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힘의 논리가 저변을 지배하는 사회는 아닌지 의문을 가질 때가 많습니다.

 

 국제문제로 온 나라가 소란할 때 여러 의견이 분분하지만 가장 힘을 얻는 명분은 한마디로 국익입니다. 우리와 관련된 국제문제에 대한 우리의 대부분 의견들은 각자 다른 것같지만 결국은 국익이라는 명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국제사회에 있어서 국제적인 관례와 법이 기본틀을 이루며 국제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것 같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그 관련 국가의 국력이 뒷받침되어야만 그 자신에게 관련된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내가' 살기 위해서는 남을 죽일 수 있다는 논리가 국제사회의 저변에 깔려 있다고 할 수 있을것 같습니다. 이러한 자신의 이익을 위한 명분이 이 나라와 우리 개인의 생활에까지 강력히 지배한다면 현대의 하루하루는 겉보기는 화려하지만 모두가 마음을 편안히 하고 더불어 함께 사는 살기좋은 낙원과는 거리가 아주 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이익만을 살리는 것은 우리 모두를 죽이는 것입니다.

 

 이제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을 먼저 생각해야 하는 논리는 우리 안에 매우 자연스러운 논리이고, 이 사회에서 아주 보편적인 논리로 자리잡은 것같습니다.  오히려 이러한 논리를 비판하는 것은 현실을 전혀 모르는 관념론자이거나 이상주의자로 여겨지기까지도 합니다. 

 

 이익의 극대화를 추구하고 끝없는 경쟁으로 점철된 자본주의의 사회에서 타인을 위한 배려, 양보 등은 강인하지 못하고 마음이 심약한 이들의 모습이거나 손에 닿지도 않은 저 높은 이상 속에서 허덕이고 있는 이들의 삶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되기도 합니다.

 

 더 이상 내가 살기 위해 남을 밟고 일어서거나 또는 죽이는 것(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이 그 자체로 도덕적 문제를 수반하지 않습니다. 남을 누르고, 꺾고 일어서는 것은 이미 이 시대의 생존적 타락입니다. 희생은 둘째  치더라도 공존의 논리도 설 땅을 잃고 있습니다.

 

 가치와 철학이 부재한 시대입니다. 오직 물질만이 존재하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가치, 철학, 삶의 태도는 세상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엇습니다. 군중들은 아니 이 시대의 많은 사람들은 "남들을 살렸으니...어디 자기도 살려보라지"(루가23:35) "남을 살리면서 자기는 못 살리는구나"(마태27)하고 예수를 조롱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 조롱이 담고 있는 내용이 예수님이 몸소 실천하신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남을 살리고 자신은 죽는 것, 자신을 죽임으로서 남을 살리는 것.

 

 세상의 가치로는 너무나 어리석은 삶이며, 조롱거리가 되는 삶이지만 그것이 바로 예수의 삶이었습니다. 예수의 가치, 철학, 삶의 태도는 세상의 것과는 분명 정반대의 대립각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나눔"이라는 것도 내가 더 잘 살 수 있는 길인 축적을 거부하는 것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예수의 삶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노동자의 절반이 비정규직으로 내몰린 세상, 강경파가 힘의 논리를 앞세우고 득세하는 세계 질서, 자본이 자본을 눈덩이처럼 키우는 양극화되어가는 사회, 내가 살기 위해 아니 더 정확히 표현하면 내가 보다 더 잘 살기 위하여 나보다 약한 이들과 말못하는 자연을 죽음으로 내몰아 극한 상황으로 몰아 붙이는 세상. 그리고 그 끝자락을 향해 가는 세상은 아닐까 우려하며 하느님의 창조의 말씀이 간절히 기다려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 땅에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을 앞에 둔 지금 "남을 살리면서 자기는 못 살리는구나"라는 조롱이 더욱 간절해지는 것은 왜일까요?!!! "남을 하나도 못 살리면서 자기만 살려고 하는구나"하는 것이 조롱거리가 되는 사회를 꿈꾸는 것이 욕심일까요?

 

 오늘은 '왕이신 그리스도'의 주일입니다. 우리의 왕되신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왕이신 그리스도는 오늘 복음에서 힘없이 십자가에 매달려있습니다. 군중들에게, 이 세상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바로 그러하기에 우리들의 왕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닐런지요.  

 

                              나눔, 그 아름다운 삶 / 가브리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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