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아리 소년
이 원 수
산들이 곱게 단장을 하고 있었다. 봄에도 저렇게 고운 빛깔을 가져 보진 못했을 것이다. 높이 솟은 북악의 멧부리에 어깨를 겨눈 듯, 험한 산들이 이리저리 골짜기를 만들면서 동으로 이어져 갔다. 이 곳은 세검정 안마을, 이 골짜기에도 그 무거운, 점잖아 뵈는 산들이 노랑과 빨강의 색동옷을 입은 듯 단풍이 들었다. 절벽 같은 바위들이 저녘 햇빛에 유난히 빛나고, 산등성이를 따라 넘어간 성벽이 멀리 그림 같다. 산골짜기에 차가운 어스름 그늘이 내리고 물소리가 한결 높아 왔다. 민이는 으스스 몸을 떨었다. 검은 바위에 남아 있는 햇볕의 온기가 다 가시어져 버리니 더 앉아 있을 생각이 없었다.책을 덮어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는 저 아래 골짜기 마을을 내려다 보았다. 동네에는 벌써 해가 졌고, 저녁 안개가 엷게 끼었다. 그늘이 산허리에서 자꾸 위로 올라간다. 이내 꼭대기까지 그늘이 덮일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민이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소영을 노려보았다. 어둠이 그 커다래진 눈을 소영에게 보여 주진 않았지만 마음으로는 느끼게 했다. 민이는 언제 이사가느냐고 묻지도 못한 채, 소영이의 뒷모습을 어둠 속에 배웅하고 있었다. 민이는 소영이의 자취가 완전히 사라진 다음에야 대문을 들어왔다. 아까운 것을 잃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저런 개구리 한마리도 죽이지 못했다. 그것들이 불쌍해서...넌 불쌍한걸 아니? 사람은 마음이 있는 것이야. 사람은 부모 형제의 사랑을 알고 자식과 어버이의 사랑을 맺고 있는 거야, 그런 사람을 죽이는 일은 나쁘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전쟁이란 놈은 누가 남을 많이 죽이나 경쟁을 해서 많이 죽이고 이긴 놈이 역사에서는 애국자가 되고 위대한 놈이 된다. 그 놈이 진정 위대한 위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니?"
"그렇다. 나라를 위해 동생까지도 죽이게 된 것만 해도 애국자지! 하지만 민이 아빠는 슬픈 애국자였어! 아버지가 자식을 쏘고, 형이 동생을 쏘고, 한겨레끼리 이런 싸움을 해서 애국을 한들 그게 떳떳한 애국이 되겠느냐? 그래 가지고 편히 산다고 행복하다고 하겠느냐? 우리는 남의 나라들 때문에 갈라져서, 남의 힘 때문에 동포끼리 싸워야 했다. 그러면서도 대포를 쏘며 온 괴뢰군 뒤에 보이지 않는 적을 쏘지 못하고 내 겨례를 쏴야 했다. 슬픈 전쟁이고 슬픈 애국 용사들이었지...하지만 이 담에 너희들이 자라서는 그런 불행이 없어야 할 텐데...우선 내 형제, 내 겨례를 사랑하는 세상이 돼야 하는데..."
마침 춥지 않은 겨울 날씨라, 아이들은 손을 잡고 끌며 산을 올라갔다. 골짜기에는 얼음밑으로 아직 개울물이 졸졸 흐르고 있었다. 양지 바른 바위 밑에는 아직도 검푸른 빛깔의 풀들이 살아 있고, 가시덤불에는 빨간 열매들이 꽃처럼 달려 있다. 민이는 앞장을 서서 산을 올라간다. 허위허위 오르고 있다가 보면 이마에 땀이 솟는다. 민이는 바위에 걸터 앉았다. 찬바람 소리가 먼 산등을 지나가고 있었다.
한참 쉬다가 오르기 시작한 세 아이들은 이윽고 고갯마루에 이르러 "야아"하고 소리를 질렀다. 눈 아래로 굽이굽이 뻗어간 산줄기와 골짜기들이 딴 세상을 보는 것같이 신기했다. 산줄기를 내려가다가 굽이굽이 돌기도 했고, 어떤 산줄기는 병풍처럼 뒤로 나있기도 했다. 민이는 저 아래 검은 바위가 있는 산을 찾아냈다. 전에 혼자 놀던 검은 바위가 있는산, 그 산을 보고 있노라니까 예전 생각이 새로워 온다. '가엾은 애국자가 되어 죽은 아버지와 삼촌, 부랑패 청년...그런 사람이 되지 않고 살아가리라.'고 민이는 맘속으로 중얼거렸다. 아이들은 큰 소리로 정다운 이름을 크게 부르고 아이들은 서로의 외침을 더 큰 소리의 메아리를 닮은 소리로 대답하였다. 산골짜기 여기저기서 산울림은 아이들의 대답을 해 주느라고 야단이다.
골짜기에는 바람 소리가 "우우"하고 찾아오고 있었다. 마치 아이들이 찾아오는 듯이.
충주 이학사 서점
'꿈꾸는 동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 문장 쓰기 / 이오덕 (0) | 2007.09.03 |
---|---|
사라진 숲 속 친구들 / 이동렬 (0) | 2007.09.01 |
꼬마 옥이 / 이원수 (0) | 2007.08.23 |
일기쓰기 어떻게 시작할까 / 윤태규 (0) | 2007.08.20 |
현근이의 자기 주도 학습법 / 김현근 (0) | 2007.08.08 |